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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녕하 23 15 5 3 50
5 치박축국 23 16 2 5 50
6 청도중능 24 12 7 5 43
7 대련천조 22 10 5 7 35
8 연변북국 22 9 2 11 29

《영광의 주인공》후속보도(4)리홍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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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룡| 작성일 :18-11-28 09:59| 조회 :1,795| 댓글 :0

본문

105메터 그 곳의 마지막 수비수 리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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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홍군. 

 

벌써 20년이 지난 그 날의 정경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리홍군은 국내외의 경기에서 발로 무수히 뛰였지만 인상에 제일 남는 건 그 날의 경기라고 말한다. 그 날 길림성축구팀에서는 제7차 전국운동회의 축구경기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로 출현하고 있었다. 

 

지난 8월의 어느 날, 북경의 한 커피숍에서 리홍군을 만났다. 립추가 지났지만 여름의 무더위는 아직도 하늘 아래에 따갑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팀은 상대팀을 두번 련속 이기고 료녕팀과 만나게 되였지요.” 

 

그 날은 바로 1993년 9월 7일이였다. 길림성팀에서는 축구소조경기에서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3일에 1:0으로 해방군팀을 이겼고 5일에 4:1로 하남팀을 가볍게 눌렀다. 7일에 길림성팀에서는 료녕팀과 대결했다. 료녕팀은 축구경기의 우승후보였다고 리홍군은 회억하고 있었다. 

 

“그 때 료녕팀에는 국가대표팀의 선수가 많았는데 후보명단에도 국가팀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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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주, 고종훈 등 선수들과 함께. 

 

길림성팀에서 먼저 꼴을 넣었다. 경기가 시작된 지 31분 만이였다. 미구에 료녕팀에서도 꼴을 만들었다. 경기가 끝나기 전 20분 만이였다. 숨가쁜 연장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꼴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 120분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피를 말리는 승부차기가 이어졌다. 긴장한 분위기는 막 잔디밭을 태울 듯했다. 와중에 리홍군이 꼴 하나를 넣었고 누군가 또 하나를 넣었다. 결국 길림성팀에서는 공 두개를 엉뚱한 데로 날려보냈다. 그런데 료녕팀에서는 신들린 듯 꼴을 련속 문대에 박아넣고 있었다. 길림성팀은 2:4로 땅을 쳐야 했고 료녕팀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뒤이야기이지만 료녕팀에서는 나중에 전승으로 축구경기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고 보면 길림성팀은 자칫 료녕팀의 그 금메달에 실패의 흠집을 낼 번했던 유일한 상대였다. 

 

사실 그 날처럼 리홍군의 축구리력에는 아쉬움이 남고 있었다. 그의 유감이라기보다는 실은 부친의 유감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축구를 남달리 즐겼던 부친은 아들에 대한 기대도 아주 컸다. 이것이 리홍군이 도문에서 소학교 1학년 때부터 공을 차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어릴 때 저는 공격수로 있었는데 왼발도 잘 찬다고 늘 왼쪽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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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국가축구팀 전임감독 슬라프나와 함께.  연변팀 대 북경국안팀간의 경기에서(오른쪽). 

 

여덟살 나던 소학교 2학년 때 리홍군은 도문체육학교에 입적했다. 매일 학교에서 방과한 후 체육학교에 가서 축구훈련을 했고 방학에는 거의 날마다 체육학교에 붙어있다싶이 했다. 그 때 축구교사는 전 길림성축구팀의 하프선수 안길남이였다고 리홍군은 회억한다. 안길남은 축구를 즐기는 어린이들에게 축구의 기초인 기본훈련부터 련마시켰다. 

 

“아버지는 제가 적어도 하프백(前卫)을 섰으면 했는데 감독님은 저를 풀백(后卫)으로 배치했어요.” 

 

연길시내의 주체육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연변주체육학교에서는 각 현과 시에서 축구를 즐기는 어린이들을 선정, 모집하고 있었다. 그 무렵인 1982년부터 리홍군은 풀백의 위치에서 소년축구팀의 경기에 참가하고 있었다. 

 

수비수는 언제나 음지에 있다. 상대측의 공을 막아내면 당연한 것이지만 실점이라도 하기만 하면 역적으로 몰린다. 어쩌면 주목도 받지 못하면서 고생만 하는 위치이다. 그래서 부친도 아들이 같은 값이면 수비수보다 하프백을 섰으면 했을가? 

 

에피소드가 있다. 리씨의 가문에서는 이름의 마지막 글자에 돌림자를 쓰고 있었는데 유독 리홍군만은 가문의 돌림자를 떠나 군대 군(军)을 이름자에 넣고 있었다. 축구장에서 뛰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축구생애를 접었던 부친은 나중에 그의 이 아쉬움을 아들의 이름자에 심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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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국안팀과 연변팀 경기에서의 리홍군(오른쪽). 

 

“진주는 모래 속에서도 빛을 뿌린다.” 

 

리홍군은 얼마후 국가소년축구팀의 일원으로 동계훈련을 가게 되였다. 국가소년축구팀의 신분은 그가 길림성청년축구팀에 가기 전까지 줄곧 그에게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었다. 

 

1987년 3월, 리홍군은 길림성청년축구팀에 입선되였다. 이 때 그의 위치는 미드필더(后腰)였다. 

 

그 때 청년축구팀과 길림성축구1팀에서는 한곳에서 훈련, 합숙하고 있었다. 길림성축구팀감독 정종섭은 청년축구팀의 경기를 늘 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년축구팀에서 공격수와 중앙방어수, 후방수비수 각기 한명씩 발탁했는데 리홍군은 수비수로 이 명단에 들어갔다. 청년팀에 입선된 지 겨우 8개월 만에 리홍군에게 생긴 파격적인 일이였다. 

 

행운의 신은 마치 리홍군의 뒤를 졸졸 따르는 것만 같았다. 1988년, 길림성축구팀에서는 을급리그 명단에 진입하며 1990년에는 갑B리그전, 뒤미처 1992년에는 갑A리그의 경기 참가팀으로 승격되였다. 리홍군의 말을 따른다면 그는 9년 동안 길림성축구팀과 더불어 땅에서 하늘까지 꼴문을 활짝 뚫은 셈이다. 

 

리홍군은 또 1993년과 1995년, 1996년, 1997년에 걸쳐 도합 네번 국가축구팀에 입선되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이 때 리홍군의 축구인생에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 생긴다. 월드컵 아시아10강경기에 참석하는 국가축구팀의 최종 18명 명단에는 그의 이름도 들어갔지만 리홍군은 선발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핑게를 대고 참석을 거부했다. 

 

사실상 국가소년팀에 다닐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아시아의 어느 국제축구경기예선에서 중도반단했던 것이다. 

 

“계속 주력으로 있었는데 감독님이 웬 일인지 저를 벤치에 후보선수로 앉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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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갑A(老甲A)축구경기에서의 리홍군.  

 

리홍군은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핑게를 대고 소년축구팀에서 자퇴했다. 상해에서 경석에 앉아 심양을 경유하여 연길까지 홀로 귀가하는 긴 로정도 힘들었지만 국가축구팀에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구나 힘들었다고 한다. 

 

“본인의 능력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축구 경력과 발전에도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리홍군은 그 유명한 월드컵 아시아10강경기에서 끝내 한번도 잔디밭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이 뼈아픈 기억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리홍군에게 잊지 못할 후회로 남고 있었다. 

 

1994년, 중국에서 프로축구리그경기가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이 때도 리홍군은 슬픈 기억을 만든다. 그 해부터 선수들의 체력검증이 있었는데 12분에 3,200메터 달리기가 합격선이였다. 리홍군은 불합격으로 판정을 받아 그 해의 프로리그경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국가축구선수팀의 일원으로 예선경기에 참가하고 귀향하면서 전문적인 체력훈련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신자에게는 화가 변하여 복이 되였다.” 그 해 6월, 북경국안팀과 이딸리아 AC밀라노팀의 축구대항경기에 참석하라는 요청전화가 날아왔다. 북경국안팀의 부감독은 예전의 중국국가소년팀의 감독이였는데 리홍군의 출중한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제7차 전국운동회 축구준결승경기에서 마침 북경팀과 길림팀에서 대결했는데 그 때 그는 특별히 제자 리홍군의 표현을 유심히 관찰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경국안팀에서는 2:1로 이딸리아 AC밀라노팀을 전승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7년에 리홍군은 길림성축구팀에서 북경국안팀으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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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북경국안 원로팀과 이딸리아 AC밀라노 원로팀간 친선경기에서의 리홍군.  

 

그 무렵 길림성축구팀은 선후로 길림성현대축구팀, 길림성삼성축구팀으로 작명했다. 한때 유명한 길림성오동축구팀이란 이름은 리홍군이 길림을 떠난 직후에 불리게 된 것이였다. 뒤미처 길림성오동축구팀에서는 전국축구갑A시즌경기에서 4위로 등극했다. 

 

북경국안팀에서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 동안 련속 전국축구갑A시즌경기에서 3위를 차지했다. 

 

북경국안팀에서는 리홍군이 이적한 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풀백이 통상 다섯명이였는데 이 때로부터 네명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사실상 리홍군은 키가 1.68m로서 수비수의 위치에 서기에는 키가 수준미달이였다. 

 

“공의 착지점이나 선수의 다음 위치를 빠르게 미리 읽어야 합니다.” 

 

리홍군은 키가 작은 대신 남보다 다른 게 있어야 했다고 수비수의 ‘비결’을 밝힌다. 남보다 뚜렷한 약점이 적은 것이 최종적으로 수비수로 선택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축구라는 건 발로 차는 게 아니라 머리로 차는 운동이지요.”

 

리홍군의 축구생애에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수들은 저녁이면 모두 숙소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다들 자률적이였는데 훈련과목을 제외하고 스스로 축구훈련을 계속했습니다.” 

 

그 때까지 연변에서는 보기 힘든 기이한 현상이였다. 연변에 있을 때 선수들은 늘 술을 마셨고 저녁이면 또 어디에 잠적했는지 만날 수 없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리홍군은 인터뷰를 받으면서 차탁에 놓은 막걸리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기어이 상큼한 과일음료를 주문했다. 직업정신으로 뭉친 북경국안팀이 중국프로축구경기에서 오래동안 앞자리를 차지했던 원인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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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중국스타팀 대 연변스타팀간의 경기에서의 리홍군. 

 

리홍군은 북경국안팀에서 4년 동안 주력선수로 뛰였다. 2001년, 그는 잠시 갑B팀인 성도오우축구팀에 조차(租借)되였다. 9월 29일, 전국축구갑B시즌의 마지막 경기에서 성도팀에서는 동일한 점수의 장춘팀을 꼴 득실차로 누르면 전국축구갑A로 승격하게 되였다. 이 때 성도팀에서는 상대한 면양축구팀을 11:2로 전승했다. 축구팬들의 말을 따른다면 탁구경기의 점수로 중국축구의 사책에 기입될 사건이였다. 이 축구추문으로 성도팀은 결국 강급되며 그 날의 경기에 참가한 성도팀의 선수 전원은 6개월의 경기중단처분을 받았다. 경기 20분 만에 수비하다가 반칙으로 경기장에서 쫓겨난 리홍군도 최종적으로 기타 선수와 동일한 경기중단처분을 받았다. 

 

리홍군은 본의 아니게 목숨처럼 사랑하던 축구장을 떠나야 했다. 북경에 돌아온 후 리홍군은 한동안 골프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손으로 치는 골프는 발로 차는 축구공처럼 그렇게 마냥 즐겁지 않은 듯했다. 

 

미구에 리홍군의 옛 수비수의 모습은 다시 축구장에 나타났다. 2009년부터 리홍군은 북경 원로축구팀의 모임인 올드보이(老男孩)클럽에 참가하고 있다. 이 클럽의 성원은 옛 갑A축구팀의 선수들인데 해마다 년말이면 옛갑A(老甲A)축구팀의 소재지에서 경기를 진행한다. 경기는 번마다 공중파를 타고 생방송되고 있다. 처음에는 북경, 상해 등 여섯개 축구팀의 선수들이 참가하다가 2017년부터는 10개 축구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현지에서 축구를 위한 모임과 행사, 방송프로에도 리홍군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또 축구를 즐기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상시적으로 축구 클럽과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연변축구가 화제에 올랐다. 2017년 프로축구의 슈퍼리그에서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연변축구의 하락세에 리홍군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나라든지 슈퍼리그에서 돈은 만능이 아니지만 돈이 받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즌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마지막까지 열심히 뛰여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정신력을 과시했으면 합니다.” 

 

오후의 길가에 드리운 긴 나무 그림자가 차탁에 기여들고 있었다. 리홍군은 폰에 저장한 지난 사진들을 불러 현시하고 있었다. 옛 수비수가 105메터의 축구장 저쪽에 실었던 그제날의 옛추억은 오랜만에 다시 우리의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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